시편 73편 : 좌절하고 절망하기에 앞서...
점점 악해져만가는 세상을 바라보고 있으면
도대체 하나님의 공의는 어디있는가?
사필귀정이란 말은 과연 맞는 것인가?
아름답고 정직하게 살려는 사람은 고통받고 착취당하고
욕망을 위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잘먹고 잘사는 이 세상에
과연 정의란 존재하는가?
우리가 살고있는 세상과 지옥은 과연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
여러가지 질문이 우리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가슴 속에 분노와 치밀어오르는 정의에 대한 갈망을 갈무리하지 못할 때
나는 시편 73편을 소리내어 읽는다.
<시편 73편>
1. 하나님이 '참으로(אך, 아크)'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2.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3.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4. 그러므로 그의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존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는도다
5.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
6.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그들처럼 말하리라" 하였더라면
나는 주의 아들들의 세대에 대하여 악행을 행하였으리이다
7.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8.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9. 주께서 '참으로(אך)'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
10.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양심이 찔렸나이다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11.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12.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13.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시인은 1에서 하나님의 법칙을 다시한번 상기한다. 하지만 이 상기는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확인이기 보다는
그 의도는 2를 통해 드러나기 시작한다.
시인은 자신의 상태를 미끄러지고 넘어질뻔한 상태로 표현한다.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시인은 그 이유를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라고 고백한다.
즉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는 분을 믿었기에, 자신과 다른 길을 가는 악인의 형통함으로,
마음이 편치 않아 미끄러지고 넘어진 상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악인들은 어떤 이들인가? 그들은 바로 3과 같은 이들이다.
두려움조차 없고 약점하나 없는 것 같은 이들은 어디를 가나 형통하고 제 하고싶은대로 하는 이들이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대로 행동하며 원하는것은 무엇이든 얻는다.
이 노래는 시인의 신정론에 대한 의구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면 어찌 이러한 부정을 그저 보고 계실까?"
그의 이 신정론적 의문은 구약시대를 거쳐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이르고 있다.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선악으로 재단된 제 머리 속의 선의 영역에 가두어버리는 교만,
마치 자신이 거룩과 부정을 구분하고 선과 악을 가르는 궁극의 재판장인냥 종횡무진 한다.
비루한 정의감으로 불타오르는 얄팍한 자아 속에 죄악의 전리품을 얻고자하는 갈망이 꿈틀댄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말이다.
문제는 이런 우둔한 실수를 범하는 것이 단지 시인 뿐만 아니라는 것이다.
4에서 나타난 것처럼 그들은 자신들의 기준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하나님의 존재를 비아냥거린다.
이 조롱은 말라기 1:2절(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How have you loved us?) 하는도다)에 등장하는 백성들의 대답과 다름아니다.
그들은 5에서 속내를 감추지조차 않는다. 그들은 악한이들과 함께 자리에 앉으며 그들과 함께 잔을 기울이며
"하나님이 어떻게 알겠는가? 지극히 '높은'(높이계신) 하나님이 뭘 알고 계시겠는가?"라고 외친다.
시인은 이것이 바로 그들의 삶의 방식이라는 것을 그렇게 함으로 그들의 부는 점점 더 늘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을 바라보며 시인은 그들과 함께 하지 않고 정결하게 사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탄식한다.
이 삶의 지혜를 알고 있기에 그는 매 순간이 고통이고 징벌처럼 느낀다.
자기 자신도 그 흐름에 몸을 던지고 싶어하며 6 그 사실을 소리내어 외치고 싶지만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어 더욱 고통스럽다.
7 왜 이런 불공정함, 불합리함, 부조리함이 이 세상을 뒤덥고있는지 지혜를 짜내서
이해하고 싶지만 너무 큰 고통이고 좌절만 맛볼 뿐이다.
하지만 그때 갑자기 반전이 일어난다.
그것이 바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희망을 버릴 수 없는 이유이다.
- 나 하나 꽃피어
조동희
나 하나 꽃피어
풀밭이 달라지겠냐고
말하지 말아라.
네가 꽃피고 나도 꽃피면
결국 풀밭이 온통
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
나 하나 물들어
산이 달라지겠느냐고도
말하지 말아라.
내가 물들고 너도 물들면
결국 온 산이 활활
타오르는 것 아니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