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시편 73편 : 좌절하고 절망하기에 앞서...

말에서 내려라 2014. 3. 7. 16:24


점점 악해져만가는 세상을 바라보고 있으면

도대체 하나님의 공의는 어디있는가?

사필귀정이란 말은 과연 맞는 것인가?

아름답고 정직하게 살려는 사람은 고통받고 착취당하고

욕망을 위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잘먹고 잘사는 이 세상에

과연 정의란 존재하는가?

우리가 살고있는 세상과 지옥은 과연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


여러가지 질문이 우리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가슴 속에 분노와 치밀어오르는 정의에 대한 갈망을 갈무리하지 못할 때

나는 시편 73편을 소리내어 읽는다.


<시편 73편>


1. 하나님이 '참으로(אך, 아크)'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2.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3.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4. 그러므로 그의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존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는도다



5.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



6.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그들처럼 말하리라" 하였더라면

나는 주의 아들들의 세대에 대하여 악행을 행하였으리이다



7.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8.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9. 주께서 '참으로(אך)'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




10.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양심이 찔렸나이다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11.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12.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13.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시인은 1에서 하나님의 법칙을 다시한번 상기한다. 하지만 이 상기는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확인이기 보다는

시인의 의심을 드러내기 위한 시도이다.

그는 1을 통해 청자의 관심을 환기시키지만 이는 현실과 언약 사이의 괴리를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있다.



그 의도는 2를 통해 드러나기 시작한다.

시인은 자신의 상태를 미끄러지고 넘어질뻔한 상태로 표현한다.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시인은 그 이유를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라고 고백한다.

여기서 원어를 살펴보면 내가 가는 길이 있는데 나와는 다른 길을 가는 이들에게

눈이 팔려 발을 잘못 디뎌 미끄러져 넘어졌다는 의미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는 분을 믿었기에, 자신과 다른 길을 가는 악인의 형통함으로,

마음이 편치 않아 미끄러지고 넘어진 상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악인들은 어떤 이들인가? 그들은 바로 3과 같은 이들이다.

두려움조차 없고 약점하나 없는 것 같은 이들은 어디를 가나 형통하고 제 하고싶은대로 하는 이들이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대로 행동하며 원하는것은 무엇이든 얻는다.

심지어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은 그들의 위풍당당함에 질투마저 느낀다.


이 노래는 시인의 신정론에 대한 의구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면 어찌 이러한 부정을 그저 보고 계실까?"

그의 이 신정론적 의문은 구약시대를 거쳐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이르고 있다.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선악으로 재단된 제 머리 속의 선의 영역에 가두어버리는 교만,

마치 자신이 거룩과 부정을 구분하고 선과 악을 가르는 궁극의 재판장인냥 종횡무진 한다.


비루한 정의감으로 불타오르는 얄팍한 자아 속에 죄악의 전리품을 얻고자하는 갈망이 꿈틀댄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말이다.


문제는 이런 우둔한 실수를 범하는 것이 단지 시인 뿐만 아니라는 것이다.


4에서 나타난 것처럼 그들은 자신들의 기준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하나님의 존재를 비아냥거린다.

이 조롱은 말라기 1:2절(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How have you loved us?) 하는도다)에 등장하는 백성들의 대답과 다름아니다.


그들은 5에서 속내를 감추지조차 않는다. 그들은 악한이들과 함께 자리에 앉으며 그들과 함께 잔을 기울이며

"하나님이 어떻게 알겠는가? 지극히 '높은'(높이계신) 하나님이 뭘 알고 계시겠는가?"라고 외친다.

시인은 이것이 바로 그들의 삶의 방식이라는 것을 그렇게 함으로 그들의 부는 점점 더 늘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을 바라보며 시인은 그들과 함께 하지 않고 정결하게 사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탄식한다.

이 삶의 지혜를 알고 있기에 그는 매 순간이 고통이고 징벌처럼 느낀다.


자기 자신도 그 흐름에 몸을 던지고 싶어하며 6 그 사실을 소리내어 외치고 싶지만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어 더욱 고통스럽다.


7 왜 이런 불공정함, 불합리함, 부조리함이 이 세상을 뒤덥고있는지 지혜를 짜내서

이해하고 싶지만 너무 큰 고통이고 좌절만 맛볼 뿐이다.





하지만 그때 갑자기 반전이 일어난다.

8 너무나도 갑작스레 닥쳐온 서광이며 예기치못한 종결이다. 마치 그리스 희곡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처럼 홀연히 등장한‘절대 해답'인 것이다.

하나님의 존전 앞에서 시인은 마치 가까운 미래를 보는 듯한 경험을 한다.

도저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악인들의 삶의 종국을 마주하게된 것이다.

비로소 우리는 9에 쐬기처럼 박힌 한개의 부사 '참으로(אך, 아크)'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이 단어가 1에도 등장하고 있으며

이제서야 시인의 교묘한 계산을 눈치채게된다.

즉 이 노래는 '참으로'라는 두개의 부사에 걸려있는 그림이며,

이 쐬기같은 두 단어를 통해 하나의 고백이 울려퍼지고 있음을 깨닫게된다.

1과 9에 등장하는 참으로(아크)라는 단어는 신학자들 사이에서 'the Great Nevertheless'라고 불리운다.

즉 매우 강력한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의미이다.

즉 시인은 매우 치밀하게 이 노래를 설계하였다. 1-7까지 그는 모든 단어와 모든 내용 즉,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의도하심에 반하는 모든 내용들이 두 개의 '아크, אך'로 둘러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는 그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멸망의 위치에 두시고 그들에게 정의의 심판을 가하신다.

10 시인은 이렇게 현실에 악이 관영하고 의인들이 바보취급받는 이 때가 마치 꿈처럼 덧없이 곧 끝날 것임을 깨닫게되고,

자신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정의와 진리를 따르는 길을 불안해했던 것을 부끄러워한다.

하지만 여호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손길을 거두지 않으신다.

11 이제서야 시인은 안도의 숨을 내쉰다. 그렇게 위태해보였던
그 길이 가장 안전하고 행복한 길이었음을 깨닫게된다.
이 고백은 다음의 고백을 떠올리게 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2)'

12 이제서야 시인에게서는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고백이 터져나온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하나님을 떠난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그 자리에 남은자들 그 남은것이 바로 복이라고 고백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서있는 자리가 바로 하나님이 지키시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내가 내 백석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준 소유에 손을 대는 나의 모든 악한 이웃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그들을 그 땅에서 뽑아 버리겠고 유다 집을 그들 가운데서 뽑아내리라.(렘 12:14)'

13 자신이 선 그자리, 자신이 지켜온 그 자리가 복의 자리임을 깨달은 시인의 입에선
이제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백이 터져나온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리가 피난처이니
내가 그곳에서 하나님의 하신 모든 것을 전파하리라.'

불만으로 시작되었던 이 노래는 신앙고백을 넘어 사명의 선포에까지 나아간다.

벼랑끝 같아 보였던 자신이 선 자리에서 곁눈질하던 시인은
자신이 선 자리가 어떤 곳인지 알지못해 혼란에 빠진다.



결국 결론에서 다시 마주한 것은 무엇인가?

시인이 성전에 나가 하나님의 영광을 통해 이 모든 상황을 확인한 후에야

자신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한탄했던 세상이

1 정결치 못한 자신의 눈으로 보았기 때문임을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눈을 들어 하나님을 마주하는 순간

우리의 눈은 마치 Zoom-Out된 렌즈처럼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고

그분의 때를 기다리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희망을 버릴 수 없는 이유이다.



- 나 하나 꽃피어

조동희

나 하나 꽃피어
풀밭이 달라지겠냐고
말하지 말아라.
네가 꽃피고 나도 꽃피면
결국 풀밭이 온통
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

나 하나 물들어
산이 달라지겠느냐고도
말하지 말아라.
내가 물들고 너도 물들면
결국 온 산이 활활
타오르는 것 아니겠느냐.